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 - 중세유럽과 기독교의 간신. 레오 3세 레폿
[목차]
PART1. 생각해볼 문제들
PART2. 샤를마뉴의 황제대관식의 주체와 의미
로마 사회 안정을 위하여 그 해 겨울을 그 곳에서 보낸 샤를마뉴는 80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미사를 위하여 생 베드로 성당에 들어섰다. 아인하르트에 의하면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으며 단지 미사를 위하여 성당에 갔다. 그가 제단 앞에서 형식을 갖추고 엎드려 기도를 마친 후 갑자기 레오 3세는 그의 머리에 있는 관을 바꾸고 옛 관습에 따라서 그의 앞에 엎드려 그에게 예배를 올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샤를마뉴에게 환호를 보내며 황제로서 인정하는 다음과 같은 귀절을 되뇌었다.“로마인들의 위대하고 평화를 주는 황제이며 하나님께서 관을 씌우신 아우구스투스 샤를에게 생명과 승리가 있을 지어다” 이러한 대관식의 절차를 거치어 샤를마뉴는 교황과 로마인에 의해 ‘황제’라는 칭호를 얻는 동시에 거대한 카롤링 제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 사건이 앞으로 유럽사회는 물론 현재 유럽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건인 ‘800년 황제 대관식’이다.
(2) 황제 대관식 당시 사회 배경(샤를마뉴와 교황을 중심으로)
샤를마뉴의 조부 샤를 마르텔은 교회의 토지를 수용하여 그것을 중장기병으로 자기를 섬길 군인들을 부양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작센의 일부를 정복하였다. 그의 계승자 페핀은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을 제거하고 자기가 처음에는 성 보니파키우스에 의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 의하여 왕으로 도유를 받았다. 그는 롬바르디아족을 로마 근교에서 몰아내고 그 지역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페핀이 죽은 후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은 영역을 두 부분으로 분할하여 각각 통치하였으나 카를로만이 3년 통치 후 죽음으로 인해 전 지역을 샤를마뉴가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정복전쟁으로 제국으로 불릴 만큼의 영역을 차지하였고 꽤 모범적으로 왕국을 통치하였으며 주위의 적으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받게 된 4세기부터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생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미리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