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주화운동감상문 - 5?8 광주 민주화 운동 다운받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 서론
우리는 매년 5월만 되면 이 땅의 민주화와 군부독재 타도를 부르짖다가 사라져간 광주 항쟁의 영령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에게는 지금 어떠한 이익과 부를 누릴 여유가 없다. 어떤 사리사욕에 치우쳐서 이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쳤던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지금 가난에 찌들린 삶과 유가족들의 슬픔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올해는 이처럼 망월동의 영령들에게 아픔만 남겨준 광주 학살자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이고, 검찰에서는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도 이들 학살자에게 면죄부를 준 치욕적인 해이다. 이런 아픈 현실 속에서 이를 반대하는 유가족 및 여러 재야단체들이 검찰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탄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태세에 발 맞추어 우리도 다시 한 번 1980.5.18 당시의 주변상황과 정세를 알아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2. 본론
먼저, 광주민중항쟁의 배경과 항쟁의 경과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부마 민중항쟁과 박정희의 몰락으로 이 땅에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극에 달했다. 70년대 말 유신체제에 정치, 경제적 위기가 극에 달해 군대, 경찰에 의한 긴급조치로도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70년대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측면에서 총체적인 모순을 양산하였고, 이는 민중들의 치열한 몸부림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생필품 물가의 급격한 상승, 독점재벌의 강화, 부동산 투기 등의 증가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무역적자와 외자도입이 극심하게 증가되었다. 또한 2차 석유파동에 의한,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경공업의 쇠퇴와 민중생존권에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군부독재의 억압정책으로 인해 10월 부산, 마산을 중심으로 민중항쟁이 발생 학생들은 “독재타도, 빈부격차 해소”를 주장하면서 가두시위를 전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은 군대의 힘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군부의 갈등은 심화되고, 자신의 충복인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피살되었다. 이 때를 틈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노태우, 정호용 등이 새로운 유신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2.?12 군사 쿠테타를 자행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를 행하였다.
‘민주화의 봄’이라 일컬어지는 80년대 초 민중은 노동자…(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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